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은 배 12척으로 일본 수군 133척과 맞붙었습니다. 이 숫자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건지 잘 상상이 안 됐습니다. 영화 명량을 보고 나서야 그 싸움이 어떤 조건에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왜 이 전투가 지금도 언급되는지 조금 이해가 됐습니다.
김한민 감독의 명량은 2014년 개봉한 역사 액션 영화로, 정유재란 당시 명량해협에서 벌어진 명량대첩을 다룹니다. 최민식이 이순신 역을 맡았고, 개봉 당시 1,761만 명이라는 한국 역대 최고 관객 수를 기록했습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 두려움의 쓸모, 해전을 가능하게 한 조건 세 가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
영화가 보여주는 이순신은 교과서에서 배운 완벽한 영웅과 다릅니다. 부하들이 도망치고, 조정은 믿어주지 않고, 몸은 성치 않습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일기에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를 되새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하면 죽는다는 이 말이 승리의 선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처럼 들립니다.
최민식의 연기가 이 지점에서 힘을 냅니다. 갑옷 안에 두려움을 숨긴 채 앞에 서 있는 사람, 그 표정이 영웅의 얼굴이 아니라 버티는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이순신이 전투 전날 밤 혼자 있는 장면에서 그게 가장 뚜렷했습니다. 대사가 거의 없는 장면인데, 그 침묵의 무게가 대사 열 마디보다 컸습니다.
리더십(leadership)이란 조직이나 집단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말합니다. 영화 속 이순신의 리더십은 카리스마나 명령이 아니라 먼저 죽을 자리에 서는 방식입니다. 부하들이 도망치다가 돌아오는 이유도 이순신이 뒤에서 밀어붙여서가 아니라, 그가 혼자 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이 아니라 위치로 이끄는 방식이었습니다.
두려움의 쓸모
영화에서 이순신이 부하들에게 하는 말 중 귀에 박히는 것이 있습니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 그 용기는 훨씬 강할 것이다." 두려움을 없애라는 말이 아니라, 두려움을 가지고 싸우라는 말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각성 이론(arousal theory)이란 인간이 일정 수준의 심리적 긴장 상태에서 더 높은 집중력과 수행 능력을 보인다는 이론을 말합니다. 두려움이 유발하는 신체적 긴장이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 반응 속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는 겁니다. 이순신이 두려움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식이 딱 그 이야기입니다. (출처: Robert Yerkes & John Dodson, The relation of strength of stimulus to rapidity of habit-formation, Journal of Comparative Neurology and Psychology, 1908)
전투에 나서는 병사들의 표정 변화도 그 연장선에 있습니다. 도망치려던 병사들이 이순신의 배가 혼자 적선을 향해 나아가는 걸 보고 돌아오는 장면, 그들이 무서움이 사라져서 돌아온 게 아니라는 게 표정에서 드러납니다. 무서운 채로 노를 젓는 겁니다. 그게 이 영화에서 가장 솔직한 장면이었습니다.
해전을 가능하게 한 조건
명량대첩이 가능했던 물리적 이유가 있습니다. 명량해협(鳴梁海峽)이란 전라남도 해남과 진도 사이의 좁은 수로로, 조류(潮流)가 하루에 두 번씩 방향이 바뀌고 유속이 최대 시속 20킬로미터에 달하는 곳입니다. 조류란 달과 태양의 인력에 의해 바닷물이 주기적으로 방향과 속도를 달리하며 흐르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순신은 이 조류의 방향이 바뀌는 타이밍을 전술에 이용했습니다. 수적 열세를 지형과 자연조건으로 메운 것입니다.
영화는 이 계산을 극적으로 연출합니다. 조류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버티는 장면, 물살이 방향을 틀면서 전세가 뒤집히는 순간이 영화의 가장 큰 전환점입니다. 역사 기록에 근거한 장면인데 보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게 오히려 긴장감을 더했습니다.
해전(naval warfare) 영화로서의 연출도 이전 한국 영화와 달랐습니다. 해전이란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군사적 교전을 말하는데, 명량은 좁은 수로에서 근접전이 벌어지는 특수한 조건을 화면에 담아냈습니다. 제작비 180억 원이 투입된 해전 장면들은 CG와 세트를 결합해 그 규모를 실감 나게 재현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출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명량대첩 관련 역사 기록)
역대 한국 영화 흥행 1위라는 기록이 말해주는 게 있습니다. 이순신이 한국 관객에게 갖는 의미가 역사책 속 인물과 다른 자리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인물을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으로 그렸을 때 더 크게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순신을 영웅이 아니라 두려운 상황에서 앞으로 나간 사람으로 기억하게 됐습니다. 완벽한 영웅보다 무서운 채로 앞에 서는 사람이 더 오래 남는다는 걸, 이 영화는 말보다 장면으로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