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때 봤던 영화를 어른이 돼서 다시 보면 눈에 걸리는 장면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그랬습니다. 어릴 때는 신기하고 예쁜 세계에 정신이 팔렸는데, 나이를 먹고 다시 보니까 치히로가 일하는 장면들이 다르게 읽혔습니다. 이게 성장 이야기라는 걸 그때야 제대로 알았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2001년 개봉한 스튜디오 지브리 애니메이션입니다. 이사 도중 낯선 터널을 지나 신령들의 세계에 들어온 열 살 소녀 치히로가, 돼지로 변한 부모를 구하기 위해 목욕탕에서 일하며 살아남는 이야기입니다. 치히로의 성장, 노동의 의미,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 세 가지로 이 영화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치히로의 성장
영화 초반 치히로는 솔직히 좀 보기 답답한 아이입니다. 불평을 입에 달고 살고, 낯선 환경에 겁을 먹고 주저앉고, 무엇 하나 스스로 해내는 게 없습니다. 그게 이 영화의 출발점입니다.
목욕탕 주인 유바바에게 일자리를 달라고 떼를 쓰는 장면이 전환점입니다. 무서운 마녀를 찾아가 일하겠다고 버티는 것 자체가 치히로로서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 이후로 치히로는 조금씩 달라집니다. 처음엔 구역질을 참으며 억지로 하던 일이 어느 순간 몸에 붙고, 위기 앞에서 도망치는 대신 먼저 나서기 시작합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이란 자신이 어떤 과제를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치히로가 직접 몸을 부딪히며 일을 배우는 과정은 그 믿음이 쌓이는 과정 그대로입니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Albert Bandura)는 이 믿음이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고, 이후 어려운 상황에서 얼마나 버티느냐에 영향을 준다고 봤습니다. (출처: Albert Bandura, Self-Efficacy: The Exercise of Control, W. H. Freeman, 1997)
저는 치히로가 강의 신 오쿠사레사마를 목욕시키는 장면을 볼 때마다 뭔가 탁 풀리는 느낌이 납니다. 역겹고 무거운 일을 끝까지 해냈을 때 오쿠사레사마가 실제로는 강의 신이었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 치히로도 관객도 같이 놀랍니다. 열심히 한 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돌아오는 그 구조가 단순한데 강합니다.
노동의 의미
목욕탕이라는 공간 자체가 이 영화의 핵심 배경입니다. 유바바가 운영하는 온천 목욕탕에는 각종 신령들이 찾아오고, 그곳을 유지하는 건 치히로 같은 노동자들입니다. 영화는 그 노동을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치히로가 처음 배정받은 일은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이고, 선임 직원들은 처음엔 치히로를 방해하거나 무시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아이들에게 일하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고 싶어서 만들었다"고 밝혔습니다. 목욕탕이라는 설정은 그냥 판타지 배경이 아니라, 현실의 노동 구조를 그대로 옮겨놓은 공간입니다. 눈치를 봐야 하고, 허드렛일부터 시작하고, 신뢰는 직접 쌓는 수밖에 없습니다. (출처: 스튜디오 지브리 공식 인터뷰 아카이브, Studio Ghibli)
가오나시라는 캐릭터가 이 맥락에서 흥미롭습니다. 가오나시(カオナシ)란 일본어로 '얼굴 없음'을 뜻하는 단어로, 실체 없이 욕망을 흡수하며 존재하는 캐릭터를 말합니다. 가오나시는 아무것도 없지만 금을 만들어낼 수 있어서, 욕심 많은 직원들이 몰려듭니다. 누구도 가오나시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그가 줄 수 있는 것에만 반응합니다. 치히로만이 금 대신 가오나시를 대합니다. 이 장면이 목욕탕 전체를 흔드는 소란으로 이어지는 게 우연이 아닙니다.
이름을 빼앗긴다는 것
유바바는 치히로에게 일자리를 주는 조건으로 이름을 빼앗습니다. 치히로(千尋)에서 한 글자를 가져와 센(千)으로 부릅니다. 영화 안에서 하쿠는 치히로에게 자기 이름을 잊지 말라고 거듭 당부합니다.
이름을 잊는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는다는 것입니다. 정체성(identity)이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스스로 갖는 인식을 말합니다. 이름은 그 정체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기호입니다. 목욕탕에서 일하다 보면 치히로들은 자기 이름을 서서히 잊어버립니다. 원래 자신이 어디서 왔고 무엇을 위해 여기 있는지를 잊으면, 그 공간 안에 완전히 흡수돼 버립니다.
이 설정이 어른이 된 뒤에는 다르게 읽혔습니다. 직장에 들어가거나 어떤 역할에 오래 있다 보면 그 역할이 자기 자신을 덮어버리는 감각, 저도 비슷한 걸 느낀 적이 있었거든요. 치히로가 끝까지 자기 이름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게, 어릴 때는 그냥 판타지 규칙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훨씬 무겁게 느껴집니다.
영화는 2003년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았고,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도 황금곰상을 수상했습니다. 두 시상식에서 동시에 받은 건 애니메이션으로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일본 역대 흥행 1위를 꽤 오래 유지하다가 2020년 귀멸의 칼날에 자리를 내줬지만, 지금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대표작으로 변함없이 거론됩니다.
다시 보게 된다면 치히로가 아니라 린을 더 눈여겨볼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치히로를 귀찮아하다가 슬쩍 챙겨주는 그 방식이, 어릴 때는 그냥 지나쳤는데 지금 보면 꽤 많은 게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