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8월,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가 개봉했습니다. 두 번이나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고 수정을 거쳐 청소년 관람불가로 개봉한 작품입니다. 국정원 요원 수현(이병헌)이 약혼녀를 살해한 연쇄살인마 장경철(최민식)을 잡아놓고도 죽이지 않은 채 고통만 주고 놓아주기를 반복하는 이야기입니다. 누적 관객은 181만 명으로 흥행 성적이 화제였던 영화는 아닌데, 지금까지도 한국 장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작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잔인하다는 말은 들었는데, 실제로 보고 나서 불편했던 건 폭력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복수의 설계
수현이 택한 복수 방식이 이 영화를 일반적인 복수극과 전혀 다른 자리에 세워놓습니다. 그는 장경철을 죽이지 않습니다. 죽을 만큼 두들겨 패고 놓아주기를 반복합니다. 고통의 총량을 최대로 늘리는 방식으로 복수를 설계한 겁니다. 처음에는 그 선택이 수현의 분노가 얼마나 극단적인지를 보여주는 장치처럼 읽혔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방식 자체가 수현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심리학에서는 복수 행위가 실제로 피해자의 고통을 줄여주지 않고 오히려 분노와 집착을 강화한다는 연구 결과가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를 반추(Rumination), 즉 고통스러운 사건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감정적으로 소진되는 상태라고 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수현은 장경철을 쫓는 내내 약혼녀의 죽음에서 한 발짝도 멀어지지 못합니다. 추격이 길어질수록 수현이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다는 게 이병헌의 눈빛에서 조금씩 읽혔습니다.
제 경험상 복수를 꿈꿔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장면들이 불편하게 다가올 겁니다. 수현이 원하는 걸 손에 넣을수록 표정이 더 어두워지는 그 역설이, 이 영화가 복수극의 문법을 비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경계의 붕괴
이 영화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진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수현이 장경철을 쫓는 동안 수현 자신도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명백히 피해자였던 사람이 폭력을 반복하면서 가해자와의 경계가 조금씩 흐릿해집니다. 영화는 그 변화를 직접 설명하지 않고, 수현이 취하는 행동의 수위가 올라가는 것을 통해 보여줍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남긴 말 중에 "괴물과 싸우는 자는 그 싸움 속에서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문장이 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수현이 장경철에게 가하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수현을 응원해야 하는지, 멈춰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 순간이 점점 늘어납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악마를 보았다는 영화등급위원회에서 두 차례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극소수의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출처: 한국영화진흥위원회). 그 판정이 단순히 폭력 묘사의 수위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건드리는 불편함은 피가 나오는 장면이 아니라,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지는 장면에서 옵니다.
이병헌과 최민식
이 영화를 버티게 하는 건 결국 두 배우입니다. 최민식이 연기한 장경철은 단순히 무서운 악당이 아닙니다. 수현의 추적을 즐기고, 대등한 적수의 출현을 반기는 인물입니다. 그 지점이 이 영화를 더 불편하게 만듭니다. 악당이 고통받는 장면에서 통쾌함을 느껴야 하는데, 장경철이 오히려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부터 관객은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이병헌과 최민식이라는 조합이 만들어낼 긴장감은 예상했는데, 두 사람이 화면에서 맞붙는 장면들이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두 사람의 감정 상태를 읽는 시간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병헌은 분노보다 절박함으로 싸우고, 최민식은 공포 대신 흥미로움을 얼굴에 담습니다. 그 온도 차이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감의 원천이었습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수현이 혼자 주저앉아 우는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원하던 것을 전부 이뤘는데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실감하는 얼굴입니다. 복수가 완성된 자리에 남는 게 무엇인지를 이 영화는 대사 없이 그냥 보여줍니다. 잔인한 영화를 보고 나서 폭력보다 그 침묵이 더 오래 남을 줄은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