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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바웃타임 (시간여행, 아버지, 후회)

by 영화 매니아 은채 2026. 6. 3.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혼자 집에서였는데, 끝나고 한참 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눈물이 나는 영화인데 슬프지 않았고, 판타지인데 현실적이었습니다. 보고 나서 아버지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는데 그냥 하고 싶었습니다.

리처드 커티스 감독의 어바웃 타임은 21살 팀(도널 글리슨)이 아버지(빌 나이)로부터 집안 남자들은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과거로 돌아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는 능력인데, 영화는 그 능력을 사랑 이야기보다 훨씬 넓은 곳에 씁니다. 시간여행의 조건, 아버지와 가족의 무게, 후회 없는 삶의 방식 세 방향으로 이 영화를 짚어보겠습니다.

 

시간여행의 조건

저는 이 영화가 처음에는 로맨틱 코미디인 줄 알았습니다. 팀이 시간여행으로 사랑을 쟁취하는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영화는 금방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시간여행(time travel)이란 과거나 미래의 특정 시점으로 이동해 그 시간대의 사건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어바웃 타임에서 이 능력은 거창하게 쓰이지 않습니다. 팀은 처음에 좋아하는 여자와의 첫 만남을 몇 번이고 되감아 더 나은 인상을 남기려 하고, 중요한 파티에서 했던 실수를 없애려 합니다. 능력이 있어도 결국 사람이 하는 짓은 비슷하다는 게 웃기면서도 공감됐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보여주는 시간여행의 진짜 규칙은 따로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뭔가를 바꾸면, 그 이후 일어난 다른 일들도 연쇄적으로 달라집니다. 팀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이 영화의 첫 번째 전환점입니다.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바꾸는 순간 잃는 것도 생긴다는 걸 깨닫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아,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게 그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영화 속 시간여행은 인과율(causality)이라는 물리학 개념과 맞닿습니다. 인과율이란 원인이 결과를 만들고, 그 결과가 또 다른 원인이 되는 연쇄 구조를 말합니다. 어바웃 타임은 그 구조를 판타지로 단순화하면서도, 시간을 되돌린다는 게 결코 '되돌리기'가 아니라는 점을 일관되게 보여줍니다.

 

아버지와 가족의 무게

빌 나이가 연기한 아버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랫동안 떠오르는 인물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따뜻하고 엉뚱한 아버지처럼 보이는데, 팀과 나누는 대화들이 쌓이면서 점점 달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아버지가 팀에게 시간여행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특별한 일을 만들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 이미 지나간 평범한 하루를 다시 살아보는 데 쓰라고 합니다. 같은 하루를 두 번 사는 것인데, 두 번째에는 처음에 놓쳤던 것들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팀이 실제로 해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보는 동안 눈물이 났습니다.

영화 속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의 관점과 이어집니다. 애착 이론이란 어린 시절 주 양육자와의 정서적 유대가 이후의 대인 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심리학 이론을 말합니다. 팀이 어른이 된 뒤에도 아버지를 삶의 중심에 두는 방식이 과장 없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게, 그 이론이 말하는 것과 정확히 겹칩니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가 이후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건 심리학에서 꽤 일관되게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출처: John Bowlby, Attachment and Loss, Basic Books, 1969)

영화 후반, 아버지의 병이 깊어지면서 팀은 시간여행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쓰든 결국 막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장면은, 저한테는 그 어떤 장면보다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빌 나이의 표정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연기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후회 없는 삶의 방식

어바웃 타임의 결말부에서 팀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시간여행을 그만 쓰겠다는 겁니다. 특별히 포기하거나 잃어서가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하루가 충분하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결말이 처음에 좀 싱겁다고 느꼈습니다. 엄청난 능력을 쓰지 않겠다니, 너무 교훈적인 마무리 아닌가 싶었습니다. 근데 며칠 지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이었습니다. 시간여행은 결국 도구였고, 영화가 말하려는 건 그 도구 없이도 지금 이 하루를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메시지는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에서 말하는 마음챙김(mindfulness)과 이어집니다. 마음 챙김(mindfulness)이란 과거의 후회나 미래의 불안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어바웃 타임은 그것을 판타지라는 형식으로 보여줍니다. 마틴 셀리그만을 비롯한 긍정 심리학 연구자들이 현재에 집중하는 삶이 행복감과 연결된다는 걸 꾸준히 다뤄온 이유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조금 더 실감됐습니다. (출처: Martin Seligman, Flourish, Atria Books, 2011)

국내 반응도 뜨거웠습니다. 개봉 당시 네이버 영화 평점 9.2점, CGV 에그지수 97%를 기록했고, 지금도 인생 영화를 꼽을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됩니다. 잔잔한 편인데 왜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는지 모르겠다는 후기가 많은데, 저도 비슷했습니다.

보고 나서 아버지한테 전화했다고 했는데, 사실 그때 딱히 할 말은 없었습니다.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가 그런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뭔지 아직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게 이 영화를 계속 떠올리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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