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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시트 (클라이밍, 유독가스, 청년백수)

by 영화 매니아 은채 2026. 6. 16.

 

여름 극장에서 뭘 볼까 고민하다 골랐는데, 나오면서 올해 본 영화 중 제일 재밌었다 싶었습니다. 재난 영화인데 무겁지가 않았습니다. 웃기면서 조마조마하고, 조마조마하면서 또 웃겼습니다.

2019년 이상근 감독의 엑시트는 조정석, 윤아 주연으로 942만 관객을 동원한 재난 액션 코미디입니다. 한국 재난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신파나 희생 영웅 서사를 빼고, 백수 청년이 클라이밍으로 도심을 탈출한다는 설정 하나로 밀고 나갔는데 그게 생각보다 훨씬 잘 됐습니다.

 

백수 용남의 클라이밍

클라이밍(climbing)이란 암벽이나 건물 외벽을 맨손과 발만으로 오르는 스포츠로, 손가락 힘과 균형 감각이 핵심인 운동입니다. 용남(조정석)은 대학 산악 동아리 에이스였지만 졸업 후 몇 년째 취업에 실패한 백수입니다. 누나들한테 구박받고, 어린 조카한테도 무시당하고, 어머니 칠순 잔치 연회장에서 동아리 후배 의주(윤아)를 서먹하게 만나는 게 초반입니다.

용남이 백수라는 설정이 그냥 웃음 소재로만 쓰이지 않습니다. 재난이 터지고 나서야 아무짝에 쓸모없어 보이던 클라이밍 경력이 가족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됩니다. 아무도 인정 안 해주던 게 진짜 필요한 순간에 빛나는 구조가, 당시 취업난을 겪던 사람들한테 특히 와닿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장면에서 뭔가 억울하면서 시원한 감정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청년 고용 동향에 따르면 당시 15~29세 청년 실업률은 8.9%로 전체 실업률의 두 배를 웃돌았습니다. 영화가 그 시기에 개봉한 건 우연이 아닐 수 있습니다(출처: 통계청).

 

유독가스가 퍼진 도심

유독가스(有毒가스)란 인체에 유해한 독성을 지닌 기체로, 흡입 시 호흡 곤란부터 피부 손상, 사망까지 이를 수 있는 화학물질입니다. 영화에서는 기업에 연구 결과를 빼앗긴 연구자가 도심 한복판에 유독가스를 살포하면서 재난이 시작됩니다. 순식간에 거리가 가스로 뒤덮이고, 용남 가족이 있던 연회장까지 번집니다.

큰누나가 가스를 마셔 위독해지고, 옥상 문은 잠겨 있고, 밖에서만 열리는 상황에서 용남이 건물 외벽을 맨몸으로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이 진짜 무서웠는데 CGI가 무서운 게 아니라 조정석 얼굴이 무서웠습니다. 특수효과 없이 배우 표정 하나로 긴장감이 만들어지는 게 신기했습니다.

옥상 문이 잠겨 있다는 설정도 지나치기 어려웠습니다. 소방청 지침에 따르면 건물 옥상 출입문은 재난 상황에 대비해 24시간 개방 상태를 유지해야 하지만,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불법으로 잠가두는 건물이 여전히 많습니다. 영화가 그걸 대사 한 마디 없이 재난 상황 안에 그냥 집어넣었는데, 실제로 저런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싶어서 보는 내내 등이 좀 오싹했습니다(출처: 소방청).

 

드론이 잡은 용남

건물을 넘고, 간판에 매달리고, 환기구를 기어 통과하는 장면들이 이 영화의 중심입니다. 현수막을 잘라 로프로 쓰고, 상패로 유리창을 깨는 식으로 주변에 있는 것들을 즉석에서 장비로 쓰는 장면들이 웃기면서 진짜 기발했습니다.

거기서 드론이 등장합니다. 뉴스 중계 드론이 용남을 발견하면서, 링거를 맞고 병원에 누워 있던 어머니(고두심)와 가족들이 TV로 용남의 탈출을 보게 됩니다. 그전까지 찬밥 신세였던 아들이 유독가스 가득한 도심 건물을 타고 있는 걸 보는 어머니 얼굴에서 코가 시큰해졌습니다. 웃기려고 만든 흐름인데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 통계에 따르면 엑시트는 2019년 개봉 한국 영화 전체에서 관객 수 1위를 기록했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재난 영화인데 나오면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죽고 살고 하는 이야기인데 개운했습니다. 용남이 마지막에 의주한테 다시 고백하는 장면도, 재난 속에서 다시 보니까 아까 거절한 거 다시 생각해봐 하는 느낌이라 혼자 피식했습니다. 무거운 거 보기 싫은 날 딱 맞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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