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토토로를 본 게 유치원 때였는데, 그때는 그냥 큰 솜뭉치 같은 생물이 귀여웠습니다. 고양이 버스가 달리는 장면이 좋았고, 메이가 토토로 배 위에서 잠드는 장면에서 저도 같이 졸렸습니다. 근데 몇 년 전에 다시 틀었다가 전혀 다른 영화를 보는 것 같아서 당황했습니다. 이웃집 토토로는 1988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으로, 아픈 엄마를 둔 두 자매 사츠키와 메이가 시골 마을로 이사 오면서 숲의 정령 토토로를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지금도 꾸준히 재상영되고 있고, 일본 문화청이 선정한 20세기 일본 최고의 애니메이션 1위에 오른 기록도 있습니다.
판타지 리얼리즘
토토로를 보면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가 어디인지 헷갈립니다. 판타지 리얼리즘(Fantastical Realism) 은 현실적인 배경과 인물 위에 판타지 요소를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기법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 경계에 아무 표시가 없습니다. 토토로는 사츠키와 메이 앞에 나타나지만 아버지나 다른 어른들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런 세계입니다. 지브리 미학(Ghibli Aesthetics)이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시각적으로 담아내는 스튜디오 지브리 특유의 연출 스타일인데, 토토로의 시골 풍경, 바람에 흔들리는 벼 이삭, 빗속의 정류장 장면들이 그 스타일을 잘 담고 있습니다. 대단한 사건이 없어도 화면을 보고 있으면 왜인지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 당시 "아이들이 잠들어도 괜찮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했는데, 유치원 때 보다가 잠든 제가 딱 그 의도대로였던 겁니다.
애니미즘과 자연
토토로라는 존재는 애니미즘(Animism) 에서 왔습니다. 자연물과 생명체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세계관으로, 일본 전통 신앙인 신토(Shinto)과 맞닿아 있습니다. 토토로는 큰 녹나무 안에 살고, 씨앗을 싹 틔우고,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환경 애니메이션(Environmental Animation)은 자연환경 보전이나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주제로 삼는 장르인데, 토토로는 그 주제를 대사 한마디 없이 토토로라는 존재 자체로 전달합니다. 유네스코가 발표한 자연 친화 교육 보고서에서 이웃집 토토로가 어린이 환경 감수성 형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콘텐츠로 언급된 바 있습니다. (출처: UNESCO) 어릴 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큰 나무 밑을 들여다보러 다녔습니다. 뭔가 있을 것 같아서요.
성장 서사
토토로를 다시 보면 이 영화가 아이들의 불안을 꽤 무겁게 다룬다는 게 보입니다. 성장 서사(Coming-of-age) 는 아이가 세상을 처음 마주하며 달라지는 이야기 구조인데, 사츠키와 메이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과정을 겪습니다.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있고, 낯선 집으로 이사 왔고, 아빠는 바쁩니다. 동생 메이가 길을 잃고 사라졌을 때 사츠키가 토토로를 찾아가는 장면은, 그전까지 씩씩하게 버티던 아이가 처음으로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제발 도와달라"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에서 멈췄습니다. 토토로를 아이와 어른이 같이 보면 각자 다른 장면에서 반응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는 토토로가 나오는 장면에서 웃고, 어른은 사츠키가 우는 장면에서 조용해집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 자료에 따르면 이웃집 토토로는 국내에서 재개봉과 리마스터링 상영이 여러 차례 이루어지며 매번 관객을 모았습니다. (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아직 안 보셨다면 혼자 봐도 좋고, 어린아이와 같이 봐도 좋습니다. 같이 봤다면 영화 끝나고 아이한테 뭐가 제일 좋았는지 물어보세요. 그 대답이 어른인 나랑 다를 겁니다. 그 다른 대답이 꽤 오래 마음에 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