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며칠 동안 이상한 상태가 됐습니다. 딱히 울지도 않았는데 뭔가 무거운 게 가슴 어딘가에 남아 있었습니다. 2004년 미셸 공드리 감독이 연출하고 찰리 카우프먼이 각본을 쓴 작품으로, 헤어진 연인의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라쿠나에 찾아간 조엘(짐 캐리)이 시술이 진행되는 동안 오히려 그 기억들을 붙잡으려 하는 이야기입니다. 77회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멜로 영화라는 말로 분류하기 조금 아까운 작품입니다.
기억의 역설
조엘이 기억 삭제를 선택하는 건 충동에 가깝습니다. 클레멘타인이 먼저 자신의 기억을 지웠다는 걸 알고, 분노와 상처가 뒤섞인 상태에서 같은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시술이 시작되고 기억들이 하나씩 지워지기 시작하자 조엘은 방향을 바꿉니다. 없애고 싶었던 것들이 막상 사라지기 시작하니 잃고 싶지 않아 진 겁니다.
이 역전이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지우고 싶다는 마음과 붙잡고 싶다는 마음이 사실 같은 감정에서 나온다는 걸, 영화는 조엘이 기억 속을 달리는 장면들로 보여줍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으로 클레멘타인을 데려가고, 시술이 닿지 않을 것 같은 구석을 찾아 헤맵니다. 그 장면들이 두 사람이 다투는 장면보다 이 사람이 클레멘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훨씬 직접적으로 전달합니다.
인지과학에서는 기억 억제(Memory Suppression)를 다룬 연구에서, 고통스러운 기억을 의도적으로 지우려는 시도가 오히려 그 기억을 더 강하게 각인시키는 역효과를 낳는다고 설명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영화 속 시술은 그 억압을 기술로 완성한 극단적인 버전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연구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우려 할수록 더 강하게 남습니다.
두 사람의 온도차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처음부터 잘 맞는 커플이 아닙니다. 조엘은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클레멘타인은 충동적이고 감정 기복이 큽니다. 관계 초반의 설렘이 지나고 나면 그 차이가 마찰이 됩니다. 영화는 그 마찰을 흐릿하게 처리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장면들이 기억 속에서 재생되는데, 미화되지 않고 그냥 불편하게 보입니다.
짐 캐리가 이런 연기를 한다는 게 처음엔 낯설었습니다. 코미디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인지, 조엘이 무너지는 장면들이 더 낯설고 더 아프게 읽혔습니다. 케이트 윈슬렛도 클레멘타인을 자유롭고 발랄한 인물로만 그리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활달해 보이는데 그 안에 불안과 외로움이 같이 들어 있는 사람이었고, 그 부분이 더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두 사람의 온도차가 관계를 어렵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서로를 필요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조엘에게는 클레멘타인의 충동성이 자신이 갖지 못한 무언가였을 거고, 클레멘타인에게는 조엘의 차분함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 당김이 결국 마찰보다 강했다는 걸, 조엘이 기억 속에서 보여주는 행동들이 증명합니다.
지워지지 않는 것
영화의 결말에서 기억이 지워진 두 사람은 다시 만나 또 서로에게 끌립니다. 삭제된 기억의 테이프를 듣고 이 관계가 어떻게 끝났는지 알게 됩니다. 그걸 알고도 괜찮다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합니다. 그 선택을 처음 봤을 때는 무모하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봤을 때는 조금 다르게 읽혔습니다.
신경과학에서는 감정 기억(Emotional Memory)이 다른 기억보다 더 깊은 곳에 저장된다고 설명합니다. 사건의 내용은 잊어도 그때 느꼈던 감정의 흔적은 더 오래 남는다는 겁니다(출처: 한국뇌연구원). 조엘이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도 클레멘타인에게 끌리는 것, 두 사람이 몬토크 해변에서 처음 만난 것처럼 다시 연결되는 것이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내용은 지워졌지만 그 사람에게서 느꼈던 감각이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겁니다.
이 영화를 보고 며칠째 이상한 상태였던 이유가 뭔지 나중에야 정리됐습니다.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 기억이 없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드는 모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두 감정이 사실 하나라는 걸 이 영화가 보여줬고, 그게 생각보다 오래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