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때부터 조선 도사 이야기를 좋아했는데, 이 영화가 개봉한다고 했을 때 기대가 컸습니다. 막상 보고 나서는 기대만큼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실망스럽지도 않았고, 집에 와서도 강동원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뭔가를 부리는 장면들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2009년 최동훈 감독의 전우치는 강동원, 김윤석, 임수정, 유해진 주연으로 606만 관객을 동원했습니다. 아바타와 셜록 홈스가 극장을 휩쓸던 같은 시기에 600만을 넘겼으니,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숫자입니다. 한국형 히어로 무비라는 수식어가 붙었는데, 실제로 보면 히어로보다는 사고뭉치 도사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전우치의 도술
도술(道術)이란 도를 닦아 얻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리는 기술로, 한국 전통 설화에서는 둔갑술, 축지법, 분신술 등이 대표적입니다. 전우치는 그중 둔갑술(遁甲術),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나 사물로 바꾸는 능력을 주로 씁니다. 근엄한 도사가 진지하게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걸로 사고 치고 다니는 이야기입니다.
전우치(강동원)는 천관대사의 제자인데 스승 말은 안 듣고 허구한 날 도술로 임금을 속이고 신선들을 농락합니다. 본인은 그게 다 재밌어 보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이 캐릭터가 너무 가벼운 거 아닌가 싶었는데, 이게 이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이었습니다. 권력자를 골탕 먹이는 철부지 도사라는 설정이 한국 설화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우치 원형과 딱 맞아 들어갑니다.
조선시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전우치는 16세기 황진이, 서경덕과 같은 시대 개성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기인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전우치는 조선 명종 연간에 활동한 도술가로 여러 설화에 등장하며, 권력자를 골탕 먹이는 의적형 인물로 민간에 전해졌습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만파식적과 화담
만파식적(萬波息笛)은 신라 시대 전설의 피리로, 불면 온갖 파도와 재앙이 잠잠해진다는 신물(神物)입니다. 영화에서는 이 피리를 요괴한테 빼앗기지 않는 게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전우치가 스승 살해 누명을 쓰고 그림족자에 봉인되는 것도, 500년 뒤 다시 세상에 끌려 나오는 것도 전부 이 피리 때문입니다.
거기서 화담(김윤석)이 등장합니다. 인간을 돕는 도인처럼 굴다가 사실은 요괴였다는 게 드러나는데, 그 반전을 김윤석이 너무 잘 가져갔습니다.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등골이 서늘해지는 그 순간이, 이 영화에서 제일 무서웠습니다. 유해진이 연기한 초랭이는 전우치의 개가 사람으로 둔갑한 캐릭터인데, 솔직히 저한테는 초랭이가 제일 재밌었습니다. 전우치보다 초랭이 나오는 장면을 더 기다렸습니다.
조선에서 2009년 서울로
족자에서 풀려난 전우치가 500년 뒤 서울에 나오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습니다. 도포를 입고 현대 거리를 걸으며 자동차를 처음 보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리둥절해 하는 장면들, 웃기려고 억지로 뭔가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상황 자체가 웃겼습니다.
요괴 사냥보다 세상 구경에 더 신이 난 전우치가 500년 전 짝사랑하던 여인과 똑같은 얼굴의 서인경(임수정)을 만나는 것도 잘 붙었습니다. 전우치 입장에서는 귀신인지 환생인지 모르는 채로 어버버 하다가 또 사고를 치는데, 이 부분이 조선 설화 속 전우치 캐릭터 그대로였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KOFIC) 통계에 따르면 전우치는 2009년 12월 개봉해 한국형 판타지 액션 장르로는 이례적인 흥행을 기록했으며, 이후 한국 전통 설화를 기반으로 한 상업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후반부가 앞부분만큼 속도가 안 나고 CG도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강동원이 전우치였으니까 됐습니다. 건방지고 가볍고 그러면서 어딘가 믿음직스러운 사람, 그 역할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을 전우치 말고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